1896년 2월 11일, 조선의 국왕 고종은 일본의 위협과 정치적 고립 속에서 비밀리에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습니다. 이 사건은 ‘아관파천’으로 알려져 있으며, 단순한 망명을 넘어 조선 왕실의 존엄을 지키고 국제 정치 질서 속에서 생존하려는 고종의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러시아 협력을 기반으로 한 정치 복귀 과정은 이후 대한제국 선포와도 연결되며, 오늘날까지도 국제외교와 주권 회복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비밀피신경로, 고종은 왜 궁을 떠나야 했나
을미사변 이후, 조선 왕실은 심각한 위기 상태에 놓였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은 고종은 궁 내부조차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했고, 일본 공사관과 친일 내각에 의해 국왕으로서의 권한이 급속히 축소되었습니다. 민심은 분노로 들끓고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고종이 행동할 수 있는 여지는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고종은 비밀리에 러시아 공사관과 접촉했고, 러시아 측은 자국 공사관으로의 피신을 허용했습니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과 왕세자(훗날 순종)는 극비리에 경복궁을 빠져나와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했습니다. 수행 인원은 최소화되었으며, 경로는 철저히 은폐되었습니다. 이 피신은 왕권이 외세의 침탈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 했던 극단적 대응이자, 당시 정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절박한 선택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곧 조선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고종이 자신을 납치당했다고 여긴 백성들 사이에선 거대한 반일 감정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러시아협력, 국제 정세 속 고종의 생존전략
아관파천은 조선 왕실이 일본 중심의 일방적 정치 구조에서 벗어나 러시아를 견제 세력으로 활용하려 했던 대표적인 외교 전략이었습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며 정국을 재정비하고, 친일 내각을 해산하는 동시에 친러 세력으로 정부 구성을 교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종은 러시아의 군사 자문, 고문단 파견, 무역 협정 등을 추진하며, 조선이 완전히 일본에 예속되는 것을 막고자 했습니다. 당시 국제 정세는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을 둘러싸고 경쟁하던 시기로, 고종의 선택은 다자외교 전략으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미국·영국 등 다른 열강들도 조선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종은 외교의 틈을 이용해 자주성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밀착이 일본의 반발을 불러왔고, 이로 인해 조선은 더욱 치열한 외교 경쟁의 무대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관파천은 외세를 상대로 단순히 피동적으로 끌려가지 않고 능동적으로 외교 전략을 구사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정치복귀와 대한제국 선포, 고종의 반격
러시아 공사관 체류는 1년 가까이 이어졌고, 고종은 내부 정세가 안정되자 1897년 환궁을 결심하게 됩니다. 그는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복귀하여 새로운 정치 질서를 구상했고, 같은 해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국호를 바꾸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습니다. 이는 고종이 단순한 국왕이 아니라 자주 독립국의 군주임을 천명한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대한제국의 선포는 주권 회복 선언이자, 일본과의 정치적 대립을 공식화한 행위였습니다. 이후 대한제국은 개혁을 시도했지만, 재정 부족과 열강 간의 외교 압박 속에 점차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나 고종의 정치 복귀는 단지 형식적인 복위가 아니라, 국가를 보전하려는 마지막 정치적 반격이었으며, 이를 통해 잠시나마 일본의 조선 지배 계획을 지연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결국 대한제국은 1910년 한일합병으로 주권을 상실하게 되었지만, 고종의 정치 복귀와 대한제국 선포는 이후 독립운동가들에게 자주정신과 주권 수호의 상징으로 남게 됩니다.
아관파천은 단순한 왕의 망명이 아니라, 근대 국제정세 속에서 국가 지도자가 취할 수 있었던 최선의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고종은 피신과 복귀, 협력과 독립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했고, 이를 통해 조선의 자주성을 잠시나마 유지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고종의 외교 전략과 생존술에서 역사적 교훈을 얻어야 하며, 외교란 단지 힘의 논리가 아닌, 상황에 맞는 지혜의 선택이라는 점을 되새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