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일본과의 외교는 긴장과 협력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대마도(쓰시마섬)가 있었으며, 이를 매개로 조선은 다양한 외교 전략을 전개했습니다. 특히 부산포 개항, 외교 사절 파견, 조선통신사 제도 등은 조선의 평화 중심 외교 철학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입니다. 이 글에서는 조선 왕들이 어떻게 대마도와의 외교 관계를 조율하며 국익을 지켜냈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사례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부산포: 조선-일본 외교의 관문
부산포는 조선 시대 대외 교류의 전진 기지였습니다. 태종 3년(1403년), 조선은 일본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부산포를 왜관(倭館) 설치지로 지정했습니다. 이로써 일본 사절단과 상인들이 공식적으로 드나들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었으며, 대마도와의 교역 및 외교가 제도적으로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부산포에는 일본 사절들을 위한 숙소와 접견 장소가 마련되었으며, 일본 측은 이곳을 통해 조선 정부와 외교적 사안을 논의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부산포는 단순한 항구가 아닌 외교 허브이자 경제 교역의 중심지로 기능했습니다. 태종은 왜구의 잦은 침입을 막기 위해 대마도주에게 도해금(渡海禁)을 지시하고, 조선 해안 접근을 제한하는 외교 조건을 명확히 설정했습니다. 동시에 부산포를 통한 무역은 허용함으로써 실리를 챙겼습니다. 특히 세종은 3포 개항(부산포, 제포, 염포)을 실시해 일본과의 공식 통상로를 확장했고, 이는 조선과 일본의 안정적인 외교 관계 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외교사절 파견과 대마도 정벌의 이면
조선의 외교는 문화적 우위에 기반한 ‘교린 외교’였습니다. 그러나 외교가 항상 평화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마도는 조선의 외교 통로이면서도 왜구의 근거지 역할도 했기 때문에 갈등이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세종 14년(1432년), 왜구의 약탈이 지속되자 조선은 결국 이종무를 장군으로 삼아 대마도를 정벌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군사 보복이 아니라 외교의 일환이었습니다. 대마도에 압박을 가한 후, 조선은 조건부 항복을 받아냈고, 일본과의 외교 관계는 다시 정상화되었습니다. 이후 대마도주는 조선 왕에게 사신을 보내 속국적 태도를 취하며 조공을 바쳤습니다. 이러한 외교는 강경함과 유연함을 동시에 구사한 것으로, 군사적 압박과 함께 문화적 우위를 앞세운 전략적 외교였습니다. 외교사절은 대마도와 오사카, 에도까지 파견되며 조선의 국위를 알렸고, 이러한 외교는 단순한 왕실 사절의 의미를 넘어 문화 교류, 상업 협상, 국경 안보의 핵심 수단이었습니다. 정조 시기에도 외교는 지속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일본에 대해 ‘정중동(靜中動)’ 전략을 취하며 공식 사절단은 줄이고, 정보 수집과 문화 교류를 통한 비공식적 관계 유지에 집중했습니다.
조선통신사: 평화를 실현한 외교 문화 사절단
조선통신사는 조선과 일본이 공식적으로 국교를 맺은 이후, 정기적으로 일본에 파견된 외교 사절단이었습니다. 처음으로 통신사가 파견된 것은 1590년, 임진왜란 직전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전야였습니다. 이후 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후 1607년부터 재개, 조선통신사는 에도 막부에 총 12차례 파견되었습니다. 조선통신사는 단순한 외교 대표단이 아니라 문화·지식·예술을 전달하는 외교 사절단이었습니다. 수백 명 규모의 인원이 참여했고, 시문집·의학서·유교 경전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일본에 전했습니다. 조선 왕들은 통신사를 통해 일본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그 속에 조선의 문화적 우위와 정치적 정통성을 각인시키려 했습니다. 정조는 조선통신사의 자료를 바탕으로 한일 지식 교류 기록집을 정리하고, 이를 국내 학자들에게 공개하며 국내 학문 발전에도 활용했습니다. 특히 1711년 파견된 제9차 통신사는 현재까지도 일본 교토와 오사카 지역에서 가장 많이 기록된 사절단으로, 그 여정과 외교적 발언, 문화 공연 등이 그림과 글로 남아 있습니다. 이 통신사를 통해 일본에서는 조선의 악기, 복식, 책자, 글씨체 등을 수입하였고, 이는 일본 에도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선의 대마도 외교는 단순한 국경 외교를 넘어서 문화와 질서를 통한 국익 실현의 역사였습니다. 부산포를 통한 외교 기반 구축, 강경과 유연을 오가는 사절 파견, 조선통신사를 통한 문화 외교는 조선 왕들의 뛰어난 국제 감각을 보여줍니다. 오늘날에도 국가의 품격은 무력보다 외교와 문화에서 비롯됩니다. 조선 왕들의 외교 전략은 한반도 외교의 뿌리이며, 현재의 국제 관계에서도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