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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왕권강화, 종친정치, 민중반응)

by 날마다 지식창고 2025. 6. 26.

흥선대원군(왕권강화, 종친정치, 민중반응)

19세기 조선, 왕권은 약화되고 세도정치가 극심했던 시기. 이때 권력을 잡은 인물이 바로 흥선대원군입니다. 그는 아들 고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강력한 왕권 강화 정책을 펼쳤습니다. 종친 중심의 인사 운영, 궁궐 재건, 조세 개편 등 여러 정책을 시행했으며, 그 과정에서 민중의 지지를 얻는 동시에 강한 반발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글은 흥선대원군의 핵심 업적과 그 의미를 시대적 맥락 속에서 정리합니다.

왕권강화의 상징, 세도정치 타파와 정치개혁

흥선대원군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세도정치의 폐단을 청산한 것입니다. 순조 이후 안동 김씨, 풍양 조씨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며 왕권은 형식만 유지됐고, 부정부패와 민심 이반이 심각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 즉위와 함께 섭정으로 실권을 잡자마자 이들 세도 가문을 축출했습니다. 그는 외척을 정치에서 배제하고 왕족과 종친 중심으로 인사를 단행하여 궁중 권력 구도를 재편했습니다. 이로써 국왕 중심의 통치 기반을 다졌고, 실제 정치의 중심에 군주가 다시 서는 구조를 복원했습니다. 또한, 경복궁 중건을 통해 왕실 권위의 회복을 시도했으며, 이를 통해 왕권이 다시 살아있다는 인식을 사회 전반에 확산시키고자 했습니다. 경복궁 복원은 단순한 건축사업이 아닌, 상징적·정치적 프로젝트였습니다. 동시에 그는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의 법전을 정비해 국가 운영의 원칙을 명확히 하고 법치 행정을 강화하는 데도 힘썼습니다.

종친정치와 관료제 재편

흥선대원군은 권력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종친 중심의 정치 인사를 확대했습니다. 기존에는 세도가나 외척 가문 중심으로 정국이 운영되었지만, 그는 정치 핵심 인물들을 자신의 측근이나 왕실 인척으로 교체함으로써 정권 장악력을 높였습니다. 이와 함께 종친을 중심으로 관료제 개편을 단행하여, 인사권을 국왕과 왕실로 집중시켰습니다. 이러한 종친정치는 외척 견제라는 긍정적 효과를 낳았지만, 동시에 권력의 편중이라는 부작용도 동반했습니다. 아울러 호포제(戶布制)를 실시하여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면서 조세 형평성을 높이려 했으며, 이는 백성들로부터 일정 부분 지지를 받았으나, 양반층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또 서원 철폐 정책을 단행해 전국 600여 개 서원 중 절반 이상을 폐쇄하며, 사족 세력의 기반을 약화시켰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중앙 집권 강화를 위한 결정적인 조치로 평가되며, 왕권 중심의 정치를 회복하려는 의지가 명확히 드러납니다.

민중반응과 정책의 한계

흥선대원군의 개혁은 민중 사이에서 다양한 반응을 불러왔습니다. 초기에는 세도 가문 축출과 양반 특권 제한, 조세 개혁 등의 조치로 인해 민심의 지지를 얻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 대한 불만도 커졌습니다. 특히 경복궁 중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백성에게 원납전(捐納錢)을 강제로 걷은 것이 큰 반발을 샀습니다. 원납전은 '자발적 헌금'이라는 명목이었지만, 실제로는 강제 징수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또한 외세와의 접촉을 강력히 거부하며 통상수교 거부 정책을 고수한 결과, 조선은 국제 질서에서 고립되었고, 이는 이후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등 외세와의 충돌을 야기하게 됩니다. 천주교 박해 역시 대규모로 이루어져 서학에 대한 탄압이 극심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조치들은 백성들에게는 공포와 불안을 안겨주었고, 개혁의 정당성에도 흠이 가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정치적 지지를 점차 상실하게 되었고, 1873년 고종의 친정 선언과 함께 권좌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그는 정치적 영향력을 잃은 뒤에도 청과 일본 등 외세의 간섭 속에서 일시적 복귀와 실각을 반복했지만, 예전의 권위를 회복하지는 못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조선 후기에 와해된 왕권을 되살리려 했던 마지막 권력자였습니다. 그의 개혁은 구체제 청산과 중앙집권 강화라는 면에서 분명한 성과를 보였지만, 민중의 고통과 외세와의 긴장 고조라는 부작용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대를 거슬러 강력한 국왕 중심 체제를 복원하려 했으나, 근대적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결국 역사에서 물러났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정책은 왕권 강화라는 목적은 달성했지만, 그것이 곧 국가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로 남아 있습니다.